개인적으로 로마서 9장이 이해하기 가장 힘들었다. 바울의 신앙적 논증의 무리수가 많이 나오는 부분이다. 아니.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장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을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며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 글을 쓴 바울 자신도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1.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부정한다고 해서 바울이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롬 9:1-33, 쉬운말〉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그 사실을 내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2) 나는 지금 마음 깊은 곳에서 큰 슬픔을 느끼고 있고,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3) 내 형제요 내 동족인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비록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할 것입니다.
- 로마서 9장은 시작부터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나온다.
- 바울은 동족 유대민족을 위해서라면 본인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차라리 그 편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 사실 이 말은 말 그대로 믿기 어렵다. 동족이 잘 된다면 자신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도 좋다고? 누가 선뜻 이렇게 하겠는가? 예수님도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형벌을 당하셨지만 십자가 형벌은 일시적 형벌이지 영원한 형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후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영광의 자리에 앉아계신다. 예수님도 당하지 않은 (혹은 당하지 못한) 영원한 형벌을 바울이 민족을 위하여 당하겠다고? 참 믿기 어렵다. 이걸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 바울이 신앙적인 허세를 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 하지만 바울은 굳이 또 이 말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짓말이 아니며, 성령 안의 양심도 이 말이 사실임을 증언해 준다고 강조하였다. 즉 예수님과 성령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맹세 비슷한 것을 하였다.
- 근데 찾아보면 또 모세도 구약시대에 바울과 비슷한 말을 하였다.
- 〈출 32:32, 쉬운말〉 “하지만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만일 주께서 저들을 용서하실 수 없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차라리 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 모세든 바울이든 진짜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저런 말을 하면서 예수님과 성령님께 맹세하는지 나의 상식으로는 진짜 이해하기 어렵다. 막상 바울더러 지옥 가라고 하면 못 갈걸?
2. 유대인의 특권
(4) 내 동족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요, 율법을 받은 백성이며,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에게서 약속을 받은 백성입니다. (5) 훌륭한 족장들이 그들의 조상이요, 인간적인 혈육으로 말하자면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이스라엘의 후손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는 만물의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한다.
- 하나님과 (아브라함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언약을 맺은 백성이다.
-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받은 백성이다.
-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
- 훌륭한 족장들이 조상이다.
- 예수님은 인간의 혈육으로 따질 수 없지만, 굳이 인간의 혈육으로 따지자면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이스라엘의 후손이다.
3. 구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이 취소된 것이 아니다. 다만 해석을 좀 달리 해야 하는 것이다. 롬 9:6-8
(6) ○ 나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은 아닙니다. (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하여 태어난 자들만을 네 자손이라고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 이것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알고 있지만, 육신의 후손이라고 모두 다 그의 자녀가 아니다.
- 그렇다면 육신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다는 말인가?
4.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말씀의 자녀 라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다. 선택의 기준은 100% 하나님의 주권이다. 롬 9:9-18
〈롬 9:9-18, 쉬운말〉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년에 내가 다시 올 때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0)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브가 역시 우리 조상인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11) 하지만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즉 그때는 그들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일을 행하기 전인데도,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선택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정했습니다. (12) 그것은, 선택의 표준이 사람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 그것은 또 성경에 “나는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14) ○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15)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불쌍하게 여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고, 어여삐 여길 사람을 어여삐 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17)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파라오를 두고 하신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를 그 자리에 세운 것은 이 일을 하기 위함인데, 곧 너로 말미암아 나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 줌으로써,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1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만드십니다.
- 아브라함, 야곱, 에서의 예를 들어 아이가 태어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즉 아이가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누구는 자녀로 선택하고 누구는 자녀로 선택 안 하셨음을 언급함
- 말씀의 자녀라는 선택의 표준이 사람의 공로나 혈통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인가? 아니다. 완악한 자를 완악하게 내버려 두고 불쌍히 여기시는 자를 선택하여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비라도 없었으면 인간은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
- 사람이 죄를 짓고 멸망하는 것이 default 값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자비가 아니라면 모두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 다만 절대 주권에 의해 택함 받은 자녀들은 멸망을 받지 않는 것이다.
- 가령 예를 들어 누군가 자녀를 입양한다고 가정할 때, 거기 있는 모든 아이들을 입양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양부모의 취향에 따라 한두 명을 입양하는 것인데, 양부모 보고 누구는 선택하였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았다며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양부모가 그 일부라도 입양하지 않았으면 그 아이들은 모두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 비슷한 예로 재난현장에서 119 대원이 사람을 목숨 걸고 구출하였는데, 일부는 구출하였는데 나머지는 죽었다. 그렇다면 119 대원더러 불공평하게 일부만 선택하여 구출하고 나머지는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대원이 있었기에 일부라도 살았지 아니라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
- 그다음 파라오 바로 왕의 예가 나온다. 이스라엘 출애굽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악역을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호와는 그 역할을 바로 왕에게 맡기셨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왕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시어 여호와의 주권 하에 악역을 맡았던 것이었다.
- 즉 이런 장황한 설명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부르심에 있어서 사람의 공로나 유대인이라는 혈통이나 선행이 미치는 영향은 단 1도 없고 이 모든 것은 100%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무리한 논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5. 바울의 예정론에 대한 반박 (토기장이 드립) 롬 9:19-23
〈롬 9:19-29, 쉬운말〉 “○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도대체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단 말입니까?” (20) 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를 한단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만들어진 것이 자기를 만든 분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같은 흙으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아무렇게나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진노와 능력을 나타내 보이실 당연한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도 오래도록 참아 오셨습니다. (23) 또한 하나님께는 자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이 자비를 베풀겠다고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권리를 사용하셨더라도,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 바로는 하나님 뜻대로 악역을 맡았을 뿐인데, 어찌하여 바로 왕을 정죄하느냐?라고 반박할 수 있다.
- 이런 식으로 말대꾸하면 안 된다. 피조물은 감히 하나님께 따지거나 말대꾸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 대해서는 바울도 말대꾸하지 마라고 버럭 했을 뿐, 납득할 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 토기장이는 어떤 진흙을 귀하게 쓸 그릇, 어떤 흙은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귀하게 쓸 사람, 천하게 쓸 사람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천하게 쓸 그릇으로 만들었냐고 따질 수 없듯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에게 따질 수 없다.
6. 하나님의 주권대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 롬 6:24-29
(24) 그분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귀히 쓸 그릇으로 부르셨는데, 우리를 부르실 때 유대인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25)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때가 오면,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겠고, 내가 사랑하지 않던 자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 부르겠다.” (26)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27) 또 예언자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대해서 외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28) 주님께서는 자신이 선포하신 것을 땅 위에서 신속하고 온전하게 이루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9) 그것은 또한 예언자 이사야가 그보다 앞서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전능하신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또한 고모라와 같이 모조리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 그분 하나님의 주권대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귀히 쓸 그릇으로 부르신 것이다.
- 그 근거로 구약에 나온 여러 레퍼런스 근거 말씀을 제공한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미 구약 여러 곳에 예언이 되어있다.
7.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율법의 행위로만 구원을 받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였다. 롬 9:30-33
〈롬 9:30-33, 쉬운말〉 “○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31) 하지만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32)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려고 헛되이 애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스스로 넘어진 것입니다. (33) 이런 사실은, 성경에 기록되기를 “보라, 내가 시온에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을 놓겠고, 사람들이 부딪칠 수 있는 바위를 놓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 메시아를 믿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여기 대하여도 구약 근거 말씀을 제공한다.
9장 총평
- 로마서 9장에서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선민사상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예정론이 나왔다. 결국 유대인이라는 혈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말이 좋아 절대 주권이지 결국 하나님 마음대로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다. 너무나 미미한 존재인 피조물은 이 이해할 수 없는 기준에 대하여 반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인데 뭐 하러 신앙을 지키려 애쓰며 살겠는가? 바울은 여기에 대한 답변도 해명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로마서 9장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지고 어려워지는 장이다.
- 사람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멸망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심판받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본인 마음대로 택하신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냥 포기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영원이라는 생활을 결정하는 구원이라는 문제이다. 그냥 포기하면 감당해야 할 대가가 너무 무섭고 너무 크다. 사람은 택함 받았다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후회라도 안 하지 않겠는가? 그 결과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과부가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는 부분이다.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심정으로 구원을 간구하고 바라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너무나 미미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계약관계로 엮일 수 있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마 15:25-28, 쉬운말〉 “그래도 그 여자는 예수께 엎드려 절하면서 간청하였다. “선생님,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소.” (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28) 그제야 예수께서 감탄하며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오 여자여, 당신의 믿음이 참으로 크오. 당신의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그 여자의 딸이 말끔히 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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